나는 1935년 경남 함안 정현리가 고향이다. 어머니와 연관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나는 유년시절 거의를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와 지척 간에 있던 친가탓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어머니는 맏며느리였는데 아이가 들어서질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걱정되어 친정에 자주 불러 약도 먹이고 치성도 들이셨다. 그리고도 한참 후 내가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후로 한참도록 이름이 없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물리러 방에 들어간 길에 친할아버지에게 울며 사정하여 이름 을순을 얻었다. 대가 끊긴다고 믿은 친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버지는 잦은 출타와 치성을 이유로 아기와 어머니를 외가로 보냈다. 사실 내 아버지 역시 친할머니가 치성 드려 얻은 귀한 아들이다.
내 어머니는 고종황제 때 國內部主事를 지낸 외할아버지 이수창의 차녀다. 더군다나 외가는 효령대군의 직계로 양반 중에 양반이다. (왕가의 피가 흐르고있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들, 이종사촌 사이에서 외가의 풍습대로 자랐다. 종손인 큰외삼촌은 기골이 장대하고 엄하셨으나 내게만은 자상하셨다. 외할머니는 꽃을 좋아하셨다. 여름내 붉고 흰 덩굴장미가 있었고 철쭉과 목단 ,수국도 키우셨다. 외할머니 치마를 오려 꽃잎을 만들다 혼나기도 했다. 내 어머니는 봄날 어린 찻잎을 따 차를 만들어 내게 먹이셨다. 밤늦도록 베틀에 올라 베를 짜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고 물들이는 법은 그냥 알았다. 이모들과는 감잎을 따 차를 만든 기억이 난다. 어떤 이른 새벽에는 홍화꽃을 따러 나갔다. 홍화떡을 만들어 두었다가 물들인 옷을 명절에 입었다. 외가에서의 제사는 일반가정의 것과는 많이 달라서 그때까지도 제사에 꽃을 만들어 썼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이모가 비단으로 만든 꽃을 만들었고 나도 옆에서 지켜보거나 도우곤 했다. 그 비단으로 만든 꽃을 음식 위에 꽂았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조선의 현실과 황실 몰락에 깊이 낙심하셨다. 목화도 따시고 누에도 치셨는데 한참 후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이층으로 된 큰 꽃상여를 타고 나가셨다. 외할아버지의 삼년상 동안 동짓달이나 일이월에는 어머니와 이모가 크고 작은 꽃을 만들어 매번 큰외삼촌에게 올라갔다. 큰외삼촌이 먹을 밥과 나물을 담은 그릇 싼 보자기를 들고 앞에 섰고, 큰이모와 어머니, 진동 할머니라 불리던 막내 이모 치마에 매달려 산에 올랐던 날이 마치 어제 같다. 생전에 외할아버지께서는 나라 없는 백성이 글 배울 필요 없다고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을 까막눈으로 살게 못한다고 외할머니가 우겨 학교에 보냈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야 내 아들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젊어서 정미소를 하다 타지로 나간 아버지는 일이 잘 되어 나중에는 철교도 세우고 다리도 만들었다. 나는 커서야 아버지가 자리 잡은 부산으로 왔다. 이화여대를 마친 후 여성을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어 1960년 여명회를 부산에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면직물을 짜는 공장을 차렸는데 염색도 했다. 이것이 훗날 오늘의 태창기업의 시작이었다. 그즈음 나는 대학에 있던 최위경 박사와 결혼하여 일본 유학을 떠났다.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 일제가 말살한 궁중문화 특히 어릴 때 어머니와 이모와 같이 만들던 채화복원이 그만 내 필생의 과제가 된 것이다.

1969년 귀국기념 꽃꽂이 개인전을 시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내외 대형 전시회를 열었다. 헌화가의 고운 이름 水路도 얻었다. 복원의 학문적 기초와 연구 및 근거자료 수집을 위해 동아대학원 사학과에 적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다. 또한 채화에 관련된 기술이라면 나이와 직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배웠다. 한계에 부딪혀 연구실에 틀어박혀 해마다 하던 개인전을 거른 어떤 해도 있었다. 그러나 공식 전시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이제 궁중채화관련 전시관과 연구소도 열게되었다.

꽃이 나를 깨웠고 나는 숨겨진 꽃들을 찾아냈다. 조선의 궁중채화는 내 더운 피와 눈물과 땀이 피운 내 인생의 꽃이다.